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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PE 체험사례

SNPE 체험사례

snpe 다시 엄마가 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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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PE / 작성일2018-07-16 13:57 / 44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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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pe 다시 엄마가 되게 하다.
부제: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서
두 딸의 엄마로 다시 서다.


나는 현재 아동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집을 10년간 운영했었고
복지시설을 운영한지는 9년이 되었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중 엄마 없이 지내던
12명의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의 직업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유치원교사, 학원원장들과 자원봉사로 시작된 복지시설,
나는 정말 행복했었고 의미 있는 하루하루였다.
복지상담 대학원을 나와
그림도 오랫동안 그렸기에 미술치료로 아동들의 심리치료를 감당하고 있었다.
또 지역에서 아동복지전문가로 3개 이상
복지시설들의 운영위원과 어린이재단의 명예 소장직을 맡아
나름 정책도 연구하고
청소년상담학회에서 청소년상담가로 활동을 했다.
9년간은 소외계층 어린이들을 모아
노래하는 아이들 어린이 합창단과 천사오케스트라,
꽃잎연극단을 운영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1.나의 어린시절과 아픔
#종합병원1
눈의 통증과 두통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보약과 비타민을 달고 살았다.
살이 찌는 스타일이 아니라 많이 먹어도 허약했고 시력도 안좋아
초등학교 2학년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아침조례시간에 햇빛을 많이 쬐면 픽픽 쓰러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시적으로 앞이 안 보이는 현상이 생겨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날마다 학교에 딸을 데리러 와 업고 가는 비일비재했다.
참 자상했던 아버지는 딸을 보며
항상 마음 아파하셨던 기억이 났다.

햇빛을 오래보았을 때 생기는 프리즘 같은 것이 보이고
눈의 통증과 얼굴일부의 마비, 저림과 손발의 감각이
없어져 걸을 수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런 현상이 있었으며 새벽기도도 가서
엄마랑 오랜 날 긴 시간을 울며 기도도 했다.

대학병원, 안과, 종합병원을 수도 없이 갔고 영양실조, 안압이 높다는 등
오진을 내렸고 급기야 결혼 후
두 번 이상 발병하여 남편과 연세대로 가서 안과 진료를 받았으나
원인불명이었고 두통에 최고 권위 있다는 박사님을 만나서 최종
오리지날 클래식 두통이라는 진단과
유전이라고 하시며 혈관확장제를 주셨다.
일어날때만 먹으라고..CT도 찍고 돈은 돈대로 들고..생리가 멎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씀과 함께.


매일매일이 불안했고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두통에
초조하기도 했다.

 

#종합병원2 


비염
비염은 초등학교2학년 때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 같다.
코로 숨 쉬는 것조차 힘들고 밤에는 산소가 부족하여
무호흡증에 시달렸다.
어릴 적부터 시작된 비염은 1년에 두어 차례
항생제 복용에 축농증, 중이염까지 겹쳤다.
눈물, 콧물, 재채기는 온도, 먼지 그 어떤 것에도 반응했고 손발은 더욱
냉해져갔다.

둘째아이를 임신을 했을 때 절정을 맞았다. 임신성비염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자
제왕절개 한 다음날 수술치료보다 비염치료를 먼저 할 정도였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두 달은 집안에 비염치료기, 셕선기를 갖추어 놓고 살았다.
비염이 온 뒤에는 면역성이 떨어져 각종 감기, 방광염에 시달렸다.
비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비염, 일상생활이 어렵고 힘들었다.

    
(두통,비염탈출기 체험사례올린 적 있음)

https://cafe.naver.com/snpe/12630

 

 

 

#종합병원3 


근막통증 증후군?? 섬유근육통??

그러던 작년 6월 방광염을 한 차례 앓고 난 후 7월 달 건강검진을
다녀온 후 알 수 없는 몸살에 시달렸다.
수면내시경을 하지 않고 그냥 위내시경을
하는 동안 긴장을 해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면역성이 바닥을 쳐서 그렇다고도 했다.


통증이 시도 때도 없이 와서 응급실을 세 차례 갔으나 열도 없고 염증도 없고
이유도 없어 그냥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먹을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환자용 튜브영양제를 맞고 하루 하루를 견디었다.
몸무게가 5키로그램이
빠져 핏기하나 없이 황달이 온 환자처럼 살았다.

아산병원에서 100만원어치의 종합검진을 받았으나 이상이 없었다.
방광, 신장 CT쵤영도 했으나 역시 이상이 없었다.
이 후 포항성모병원으로 가서 자가 면역 질환검사를 30만원을 주고 했으나
또 이상이 없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며
섬유근육통일수도 있으니 3개월 뒤에 보자며 진통제와 신경안정제를 받아서 돌아왔다.

살고 싶지 않았고 아침에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았으며 좋겠다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물이 쏟아졌고 왜 나만 아파야 되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한데
왜 나만 고통 속에 있어야 되는지 원망과 슬픔이 쏟아졌다.
두 딸아이는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살았고 남편은 집안 살림에
아이들 육아에 밤에는 잠 못 드는 아내를 위해 간호하느라 정신없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종합병원4
우줄증과 불면증
 
한달이 지나자 우울증이 왔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집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나는 신경의 문제일 수 있으니 신경과를 가보기로 했다.
신경과에서는 신경의 이상이면 벌써 다른 곳이 이상이 올꺼 라며
방법이 없으니 고생하실꺼라며 멜라토닌를 처방해주었다.
물론 불면증이 심각해진 단계라 수면제가 필요했으나 먹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을 붙들고 펑펑 울었다.
원망과 불평을 고생하는 남편에게 퍼부었다.
근육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나는 여전히 낫지 않는다.
정형외과의사도 평생 그렇게 살아야 된다. 산재신청을 하던지
정신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등 수많은 말을 했다.

그런 현실 앞에 나는 무너져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고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죽고 싶은데 내손으로는 죽을 수도 없는 고통 속에 시달리며 매일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2.snpe를 만날 수 밖에 없는 시간들

8월 초 외숙모가 아프다는 소릴 듣고 조카가 울진으로 내려왔다.
snpe강사였던 조카는 근육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근막통증증후군을 이야기 해주었으나
모든 것이 불안 한 상태라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옆에 있어주기만 바랬다.
3일동안 웨이브베개 1234동작과 운동을 연습시켜주었다.
척추를 바로잡아야 건강이 보인다 책은 작년에 사서 두차례 읽은지라 운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른자세학회에 들어가 사례를 수시로 찾아 읽었다.

그러나 확신이 오지 않았고 자꾸 두렵기만 했다.

이후 3개월을 홈트로 운동을 하다가 본원으로 올라가 교수님을 만나 뵙고
나는 강한 확신과 희망을 얻고 왔다.
척추의 구조에 대해 설명해주셨고
척추가 자전거체인처럼 마디마디가 휘어져 유연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골반과 고관절에 대해 연구하는 이가 누가 있었던가 신기했다.
나는 만날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snpe를 만난 것은 나의 희망이었다.


근육과 근막 반드시 해결된다.
경추의 변위가 문제라는 것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의사는 현대의학으로도
안된다며 그냥 살으라고 했는데 교수님은 그날 코로 숨을 쉬게 해주시며
이것만 알면 된다고 하셨다.
국가대표선수들을 교정해주시는 분께 교정도 받았었고 한의원도 수없이 다녔고
헬스도 오랜시간 했는데 아무도 이런 몸의 구조에 대해 연습시켜주시지 않았다.

본원수업을 3개월간 듣기로 하고 등록을 했다. 물론 확신과 두려움의 반복이었다.
처음 본원에 올라가던 날 걸을 수 없었고 가슴이 두근거림과 공황장애로 울진으로 돌아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운동을 하고 오면 어깨 압점과 발다닥의 통증이 좋아져 살 것 같았다.
그 후 안 좋았던 곳이 드러나면서 허리를 삐긋하기도 하고
급피로와 통증과 심리적인 것들과 싸워야했다.
추워도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걸었다.
한시간 반 만보를 걸었고
운동도 이를 악물고 했다. 눈물을 수도 없이 흘렸다.
500번이상은 구르고 피가 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럴수록
후방변위가 된 척추들은 더욱 나를 잡아 끌었다.
근육을 너무 쉽게 바라봤던 나.
그것을 부드럽게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골반에 대해 고관절에 대해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헬스, 요가, 재즈댄스도 나의 몸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3개월이 지나 더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몸으로 느낀 것을
이론으로 배웠야겠다는 생각에 지도자과정을 등록하였다.
처음 다시 시작하는 날
걸으면서 수도 없이 되뇌이었던 구조변화
나는 할수 있다. 점진적으로 변화하자 천천히 하다보면 반드시 해결된다라는
확신이었다. 확신이 서자 그 어떤 변화가 와도 두려워지지 않았다.

 

  5년을 헬스를 해도 여전히 허리가 아프고 요툥에 시달렸음
 

 

3.지도자과정 3개월간의 변화
흙탕물
구르기를 하는 동안 후방된 척추는 더욱 튀어나와 멍이들고
이석증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이명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어지러움증도 나타나 서있기 힘들 정도였다.
두려움이 다시 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는 듯 통증을 느끼기도 했다.
근막에서 주는 살이 따가운 느낌 온몸의 몸살, 허리가 삐긋해 며칠 운동을 못하기도 하고
그러나 내가 그렇게 살아 온 결과이기에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도구로 하루8시간 이상을
부여잡고 있었다. 1번 자세는 30초에서 1분20초를 견디었고 L무브는 600백개 T무브는
여러 가지도구로 700개씩 하면서 운동에 집중했다. 하루종일 운동도 해보고 8시간 이상
운동을 하며 통증과 부딛쳐야했다.
 
*나의 잘못된 자세로 인한 뼈구조*




 

 

자세의 변화
어깨의 높이가 맞아졌다.
틀어진 골반 때문에 항상 멍이 들어있던 오른 쪽 후상장골극은 2개월이 되었을 때
바로잡혀 다리길이 같아졌다. 고관절벨트를 8시간을 착용했던 결과와 무브운동의 결과였다.

 










생리주기가 일정해짐
25일, 30일 주기가 뒤죽박죽이었던 나의 생리가 매달 23일만 되면 정확하게 돌아왔다.
일정해진 것은 본원에서 운동할 때부터였고 지도자과정을 지나는 동안 생리혈이
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진짜 신기했다.

 

우울증과 진통제를 끊음
본원에서 교수님을 만나 뵙고 나는 3개월동안 먹던 약을 끊어버렸다.
2주는 참기 힘들었지만 운동을 하면서 견딜 수 있었다.
진통제를 먹지 않고 잠이 들었고 우을했고 절망적이었던 시간들
죽어버리고 싶었던 공포의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4.다시 엄마로 서기까지
지도자과정을 갈 때에도 남편이 울진에서 서울까지 왕복10시간되는 거리를
기차를 타고 함께 동행해주었다. 남들은 부러워했지만 나는 마지막 수단이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찌 참을 수 있었을까 지하철 안에서 통증을 부여잡고 속으로 울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근육을 풀고 운동을 하면 통증이 사라졌다. 하루에 두 번 정도 찾아오던 통증도
3일씩 안 아프기도 하고 등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현대의학으로도 안되는 것이 완화되는 것을 아는 이상 나는 멈출 수가 없다.
물론 100% 완치는 아니지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희망이 없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나는 자유로워졌다.
snpe가 답이 아니라면 1도 좋아지면 안 된다. 그런데 나는 좋아지고 있고
그 해결점을 알고 있다. 완전하게 벗어나는 그날까지 지역내에서
이 운동의 가치와 철학을 전하고 살 것이다.


두 딸아이가 엄마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엄마가 일어나 아침을 차려주는 것이 얼마만인지
아이들이 행복해한다.

나는 이제 엄마이다...
은지은서의 엄마이다.

엄마 없는 아이들을 돌보며 나는 정작 내 아이들에게 엄마 없는 아이들을 만들었다.
snpe를 만나 나는 다시 엄마가 되었다..........
40명의 아이들의 엄마까지....... 


 

 

 

일어서서 최선을 다해 운동하며 내 몸을 귀히 여기며 살아가려한다.
이렇게 귀한 운동을 만들어 낸 최중기 교수님과 윤지유 교수님
그 가슴 벅찼던 시간들을 기억하며..

나처럼 아픈 이들을 돌아보며
그리고 청소년 아이들의 척추를 위해 전도사가 되어야겠다.
소외된 우리 복지시설아이들과도 즐겁게 운동을 해야겠다.


교수님의 말씀처럼 꽃은 반드시 핀다는 것을 믿는다.
비바람이 불고 그것을 견디는 날
작은 차이가 큰 가치를 만든다!!!!
나는 그 가치를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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